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양 사태 (문단 편집) === 배경 === 신양은 물자가 풍족했다. 그러나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으로 기근의 조짐이 발생, 인민공사가 도입되자 상황이 심각해진다. 신양은 인민공사가 도입된 대표적인 곳이었는데,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공용급식소에서만 식사, 식량·식기를 모두 수거당한다. 1959년 3월 당은 전국의 기근은 무시하고 식량 1350억 근 수출을 결정, 1959년 신양 양곡 생산량은 32억 5800만 근이었으나 당국은 72억 근으로 부풀려 정부는 9억 근 공출을 지시한다. 당국은 이를 채우고자 주민들을 핍박해 양식을 공출,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러 희생자들은 줄에 묶여 온몸이 시퍼렁게 멍들도록 맞다 죽어갔다. 굶주린 주민들은 수종을 흔히 앓아 맞을 때마다 몸에서 물이 나왔고, '모든 물이 빠져나올 때까지 맞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워낙 굶어 맞아도 들판에 나가지 않자 간부들은 더 가혹하게 군다. 사람들을 줄로 묶어 때론 나체로 물에 던지고 누군가는 나체로 비투회에서 공개규탄, 누군가는 여름에 양 팔을 옆으로 뻗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서기도, 돌이나 깨진 유리에 무릎을 꿇기도 한다. 인두로 지지거나 끓는 물을 붓기도, 배설물을 먹이기도 했다. 신체절단형도 잦았다. 식량을 조금 훔쳤다는 이유로 귀를 자르고, 감자를 한 알 파내 먹었다는 이유로 한쪽 귀를 절단, 다리를 철사로 묶고 등에 10kg이 넘는 돌을 얹은 뒤 인두로 지졌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때론 죽을 때까지 때리게 하는 등 가족간 구타를 강요하는 일도 잦았고 생매장도 했다. 처벌은 사후에도 이어져 시신은 길가에서 냄새를 풍기며 썩고, 일부 무덤엔 '반당분자', '장제스의 수구' 등이 쓰인 표지판을 세웠다. 1959년 가을 신양지위는 민병대를 동원해 농민과 말단 간부가 숨긴 식량을 몰수, 그 과정중 1만여 명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비투회에서 자아비판하는데, 700명이 죽는다. 당국은 생산량의 절반인 16억 근을 징수했고, 대가는 처참했다. 농민의 손에 남은 식량은 100근으로 불과 4개월 분량이었고 일부는 3개월도 안 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